5. 기쁜소식선교회의 태동 (1)



1)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로 시작된 선교학교


"30여 년 전 대구 파동에서 사역할 때 주님은 내 마음에 선교학교에 대한 마음을 자꾸 일으키셨다. 선교학교 운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내게 그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 우리 교회는 성도들도 많지 않았고 참 작고 초라했다. 심지어 우리 가족은 양식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못하기도 했던 어려운 때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도할 때면 계속 선교학교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셨다. 그것은 분명 내 뜻이 아니었다. 물론, 성도들의 뜻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뜻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실을 깊이 발견하면서 결국 내 자신과 형편을 부인한 채 선교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박옥수 목사, 월간 '기쁜소식' 2005년 12월호)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기쁜소식선교회는 박옥수 목사의 신앙관을 토대로 1976년 7월 12일, 거듭난 전도자들의 양성 기관인 선교학교(한국복음 선교학교)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선교학교의 시작은 박 목사를 비롯한 어느 누구의 뜻에 의해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당시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인간의 기준과 판단으로는 결코 선교학교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박 목사 자신부터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많은 갈등을 해야 했다. 당시 박 목사가 시무했던 대구중앙교회는 화신반점이란 중국집 2층의 작은 홀을 빌려 사택과 예배당을 꾸민 초라한 교회였고, 성도도 40여 명밖에 되지 않는 개척교회였다. 하지만 선교학교를 향한 하나님의 뜻 앞에 박 목사는 결국 마음을 정했고, 예배 시간에 선교학교에 대해 광고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도들 모두가 선교학교를 반대했다.


"그때 온 교회 형제 자매들이 박 목사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했습니다. '목사님도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가난한 형편에 선교학교를 시작하면 누가 학생들을 먹여 살리냐?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형편이나 사람에게 기대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형편은 불가능했지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여 선교학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었습니다."(김동성 목사, 남대구교회 시무)


당시 대구중앙교회 학생으로서 선교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 김동성 목사의 증언처럼, 선교학교 시작을 온 성도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주님은 박 목사의 마음에 선교학교에 대한 당신의 뜻을 여러 부분으로 보이시면서 그의 마음을 이끌어 가셨다. 그 중 하나가 박 목사의 장모 오빠인 임영빈 박사의 후원이었다.


2)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임영빈 박사의 후원


"복음적인 선교학교 시작은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다. 자네, 이 일을 꼭 해야 한다. 나도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 이제는 어렵다. 내가 마음을 다해 도와줄테니 자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시작하라. 단 겸손한 마음으로 해라."(임영빈 박사,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및 세계성서공회 실행위원회 위원)

임영빈 박사는 1949년 3월부터 1966년 5월까지 17년 동안이나 대한성서공회를 대표하는 총무로, 1957년에는 세계성서공회 실행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한 한국 기독교사의 중심 인물이다. 그는 1949년 대한성서공회 총무 선임 후 영국 여왕(현 엘리자베스 2세)을 알현하고 지원을 약속 받음으로 대한성서공회가 1949년 6월 21일에 세계성서공회(USB, 영국 런던 인근 소재)에 공식 가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6 · 25 동란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당의 눈을 피해 한글 성경 원고를 보존하기도 했다. 특히, 1961년 7월 10일 초판되어 지금까지 1,200만 한국 기독교인들의 표준 성경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한글판'(발행인 임영빈 박사, 2004년 12쇄 발행) 출판을 위한 교정을 전쟁 중에도 일본 동경성서회관에 가서 볼 정도로 한글 성경 보존 및 보급에 일생을 바쳤다.

임 박사는 누구보다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특심을 가졌기에, 연로하여 1966년 대한성서공회를 은퇴한 자신에게 한국 복음화를 위한 선교학교 의논을 위해 찾아간 조카사위인 박옥수 목사를 매우 기뻐하며 반겼다. 그는 박 목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신앙 서적들을 아낌없이 주면서 믿음으로 선교학교를 시작할 것을 격려했고, 마음을 다해 후원할 것을 약속했다. 당시 한국 복음화의 중심 인물이었던 임영빈 박사의 후원은 성도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던 박 목사의 마음에 큰 힘을 주었고, 선교학교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더욱 깊이 깨우쳐 주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시 박 목사를 통해 대구에서 일어난 복음의 역사와 그 역사의 바탕이 되었던 '영원한 속죄제사'(히 10:12)에 대한 말씀을 통해 선교학교에 대한 당신의 뜻을 더욱 분명히 보이셨다. 1973년 1월 26일부터 대구에서 사역을 하게 된 박 목사를 통해 주님은 대구효성여고, 경산조폐공사 등에서 계속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는데, 특히 기성교회 목사나 신학생들도 박 목사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박 목사가 얻은 별명이 '속죄 목사'였고, 그 복음의 역사의 바탕이 되었던 말씀이 영원한 속죄제사에 대한 말씀이었다. 대구에서의 복음의 역사와 그 역사의 토대를 이룬 영원한 속죄제사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교학교를 앞두고 박 목사에게 허락하신 선물과도 같았다.


3) 영원한 속죄제사에 대한 복음의 진수(眞髓)를 발견

"대구에서 사역하던 어느 날 C. H. 매킨토시가 쓴 모세오경 강해를 읽게 되었다. 그 책은 정말 내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었다. 그 책을 읽은 후 전에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출애굽기의 성막과 레위기의 속죄제사 등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세오경과 히브리서 등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은 내게 구약시대 속죄제사와 신약시대 속죄제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깨우쳐주셨다. 특히,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 세상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된 사실을 분명히 발견케 해주셨다. 그로 인해 복음을 더욱 힘 있고 자세히 전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박옥수 목사, 월간 '기쁜소식' 2005년 10월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흰눈 같이 깨끗이 사하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 교인들은 물론 목회자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이 왜,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라 온전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1860년에 출판되어 챨스 스펄젼과 디엘 무디의 복음 전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C. H. 매킨토시(C. H. Mackintosh, 영국 플리머스 형제단)의 '모세오경 강해'를 접하면서 모세오경에 매력을 느낀 박옥수 목사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더욱 출애굽기의 성막과 레위기의 속죄제사에 대해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약시대 속죄제사와 신약시대 속죄제사의 연결 과정을 분명히 깨우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기쁜소식선교회의 대표적인 집회 주제가 되어 온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의 주요 내용이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복음의 진수인 영원한 속죄제사의 과정을 분명히 발견한 박 목사는 더욱 힘 있고 자세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우병석 목사, 백창덕 목사, 최동근 목사, 최홍 목사, 박정태(성서침례교회신학교 신학생), 박천수(대구신학교 신학생) 등 기성교회 목사와 신학생들이 박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구원을 받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는 당시 한국의 많은 신학교와 목회자들이 한국의 복음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인도 분명한 복음을 알지 못하여 거듭나지 못한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복음을 통해 구원의 믿음을 얻게 해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은 박 목사의 마음에 한국에 분명한 복음을 전하는 거듭난 전도자를 양성하는 선교학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시켜준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사실 박 목사는 김천에서 사역할 당시 이미 거듭난 복음 전도자들의 양성과 거듭난 교회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4) 거듭난 성도는 거듭난 목회자 밑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주님께서 내 능력과 한계를 넘어서 나를 인도하실 때가 많았다. 그 중 하나가 김천에서 사역할 당시 내가 기성교회에 집회 강사로 가서 말씀을 전한 일이다. 당시 나는 어리고 부족하여 기성교회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 여름 성경학교를 이끈 우리 어린이 전도 팀들을 통해 은혜를 입은 교회들이 그 해 겨울 부흥회 강사로 나를 초청한 것이다. 그래서 진천감리교회, 산청생초교회, 보은장로교회, 하동악양교회, 하만법수교회 등 여러 기성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대부분의 교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기뻐했다. 그런데 문제는 몇 개월이 지난 후 다시 그 교회들을 방문했을 때 그들 마음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게 큰 의문과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거듭난 성도는 거듭난 목회자 밑에서 양육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박옥수 목사, 월간 '기쁜소식' 2005년 3월호)


1969년 5월에서 1973년 1월까지 김천에서 사역을 한 박 목사는 '어린이 선교회'를 설립하고 어린이 전도에 주력했다. 특히 여름이면 전국에서 어린이 전도 팀을 모집하고 훈련하여 전도 팀을 초청한 기성교회들의 여름 성경학교를 인도하게 했다. 그때 1만여 명의 어린이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고, 주일학교 교사들이나 교인들도 복음을 접하면서 변화를 입었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어린이 선교회' 회장이던 박옥수 목사를 교인들이 자기 교회 정기 부흥회 강사로 추천을 하게 되어 20대 후반의 젊은 목회자였던 박 목사가 기성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박 목사의 위의 간증처럼, 분명히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을 받아 기뻐하며 거듭났던 교인들이 얼마 후면 다시 은혜가 아닌 율법에, 믿음이 아닌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원인을 두고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박 목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만일 거듭난 성도들이 거듭난 목회자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의 양육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 박 목사는 비로소 기성 교회에 초청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일만으로는 한국의 복음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복음 전도에 전적으로 헌신한 박 목사의 마음에 거듭난 전도자 양성과 거듭난 교회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게 했다. 물론 그것은 이 시대의 복음 전도와 구원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었다. 그 뜻이 1976년 거듭난 전도자들을 양성하는 선교학교의 시작으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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