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쁜소식선교회의 태동 (2)


1) 선교학교의 시작과 입학 및 파송 조건


드디어 1976년 7월 12일, 주님은 박옥수 목사를 통해 기쁜소식선교회 선교학교를 시작하셨다. 제1기 선교학생으로서 김동성, 박현수, 정계자, 장정순, 박정태 등 5명의 학생이 입학하여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선교학교 상황에 대해서 선교학교 1기생이었던 김동성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선교학교가 시작되기 전 박 목사님은 가족과 함께 15평정도 되는 대구교회 예배당 안에 꾸며진 작은 방에서 생활하셨는데, 선교학교가 시작되면서 바로 옆의 집으로 이사를 가셨고, 대신 저희들이 그 예배당에서 살았습니다. 하루는 한 선교학교 학생의 부모님이 아들이 선교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니까 학교에 대해 알아보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초라한 예배당에서 만난 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학교는 어디냐?' '여기입니다.' '수업 받는 데는 어디냐?' '여기입니다.' '밥 먹는 곳은 어디냐?' '여기입니다.' 그때 그분들은 기절초풍할 듯한 얼굴을 하셨습니다. 그처럼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교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김동성 목사/ 남대구교회 시무, 선교학교 교번 7601001)


이의 같이 처음 선교학교가 시작되었을 때는 강의실, 기숙사, 식당 등이 따로 없이 대구 교회 예배당에서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인근에는 그렇게 어려운 형편을 이기고 믿음으로 선교학교를 시작한 박 목사를 부러워하는 목회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박 목사와 친분이 있던 김석규(성서침례교회 시무), 노현기(서울 교회 시무) 목사 등은 선교학교에 함께 하고자 했지만, 믿음으로 진행하는 부분에 한계를 느껴 중도에 모두 포기했다. 다만 당시 부산에서 사역하던 고(故) 오창명 목사와 박 목사의 선교학교 동기생인 김성준 선교사(브라질 원주민 선교)는 한번씩 선교학교 수업 시간에 강의를 하곤 했다.



선교학교는 1년 과정으로 수업료는 전액 무료였다. 모든 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인데, 기숙사 시설이 완비되지 못한 초창기에는 가족을 동반한 학생은 선교학교 근처에 따로 방을 얻었다. 물론, 현재는 모든 선교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선교학교 입학은 나이와 학력을 불문한 채 복음 전도에 은사가 있다고 여겨져 목회자 추천을 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소명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교학교 8기생이었던 주종식 선교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열여섯 살 되던 1978년 7월에 구원을 받은 후 거창침례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개척된 지 얼마 안 된 교회가 너무 초라했고, 살림도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택에서 자주 굶으시는 전도사님의 삶이 너무나 어렵게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복음이 정말 귀했고, 복음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사시는 사역자님들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져 언젠가부터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다만 복음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제 마음을 아셨는지 저희 교회 전도사님이 저를 선교학교에 추천해주셨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저는 빡빡머리 학생으로 면접을 보았는데, 제 염려와는 달리 박 목사님은 하나님이 제 마음에 허락하신 복음을 향한 마음 하나만 보시고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때 믿음만을 보시는 목사님과 우리 교회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주종식 선교사 / 일본 동경은혜교회 시무, 선교학교 교번 8008026)

또한, 1년 후 선교학생들의 파송 때에는 분명한 복음 전도의 은사가 있는 학생들을 파송하며, 목사 안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목회의 은사가 있는 전도자들을 선별하여 주고 있다. 이는 시험을 통해 전도사나 목사로 안수 받는 일반 신학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인도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2) 선교학교의 일정과 핵심

 

선교학교가 개교될 당시는 딕 욕(미국, 믿음의 방패 선교회), 케이스 글라스(영국, 웩 선교회) 선교사 등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박 목사가 졸업한 선교학교가 중단된 상태였는데, 박 목사는 그 선교학교의 맥을 이어 똑같은 방식으로 선교학교를 진행했다. 하루 일정은, 오전 5시 30분 ~ 7시 새벽기도회, 오전 9시 ~ 12시 수업, 오후 2시 ~ 5시 전도, 오후 7시 ~ 10시 예배 및 모임 순이었다. 그 중 가장 복되고 소망스런 시간은 수업 시간이다.

"박 목사님은 수업 시간에 다른 무엇보다 성경 말씀에만 초점을 맞추어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 오경이다. 식물의 뿌리처럼 모세오경은 성경의 뿌리이다. 모세오경의 말씀들이 신구약 66권 전체에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먼저 모세오경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모세오경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수업 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비록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전도 시간에 차비가 없어서 많이 걸어 다녔지만,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그 모든 어려움을 잊을 수 있었고, 소망으로 가득 차서 그 시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김동성 목사/ 남대구교회 시무, 선교학교 교번 7601001)



"선교학교 수업 때 박 목사님은 믿음의 말씀과 함께 당신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꿈과 마음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 교회가 작지만, 앞으로 전국 곳곳마다 교회가 개척되고, 해외에 선교를 나갈 것이며, 방송선교를 할 것이다.'는 목사님이 받으신 꿈과 함께 하나님이 매 순간 주시는 마음을 수업 시간 때마다 전해주셨는데, 그것은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선교학교 시절 하나님이 목사님께 주신 마음을 하나씩 이루시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고, 어떤 수업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실제적인 수업이었습니다. 믿음에 대해 막연하고 영적 감각에 둔한 제 마음도 목사님의 믿음과 수업 시간에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믿음의 감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선교학교 수업은 제 인생 중 가장 복된 시간이었습니다."(김성훈 목사 / 기쁜소식강남교회 시무, 선교학교 교번 8517064)

"저는 신학 교수를 꿈꾸며 대학에 들어가서는 C.C.C(한국 대학생 선교회)의 대구대학 순장(대표)으로서 정말 열심히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해결되지 않는 죄 문제로 인해 고민했고, 학생들에게 여러 신학 서적과 주석 등에서 뽑은 말씀을 짜집기하여 전하는 것에도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박 목사님을 소개 받았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이론이 아닌, 너무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생생히 전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전하신, 성령의 감동으로 묶인 줄에서 풀려난 삼손에 대한 말씀이 그토록 해결되지 않았던 저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그 후 주님의 은혜로 선교학교에 들어갔는데, 제가 아는 여러 목사님들과는 달리 성경 하나만 가지고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마치 샘물이 퐁퐁 솟아나듯, 똑같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도 새로운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정말 이곳에 성령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김욱용 선교사 / 인도 아삼교회 시무, 선교학교 교번 8313043)


3) 선교학교의 운영과 초점


또한, 선교학교의 운영과 초점은 과거 거듭난 선교사들이 선교학교를 운영했던 때와 같이 오직 믿음만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 맞추어져 있다.


"목사님은 믿음의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시는 교회에서 목사님에게조차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던 가난한 때라 선교학교 재정은 늘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오히려 믿음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저희들을 이끌어주셨습니다. 당시 선교학교 원서대가 5천원이었는데, 목사님은 선교학생 모두가 사람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께만 구하여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믿음이 참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목사님의 마음을 받아 하나님께만 기도를 했는데, 얼마 후 응답을 받는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이 제 마음에 실제적인 분으로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목사님께서도 친히 믿음의 삶을 사시면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당시 저는 구두가 없어 양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전도를 하러 다녔는데, 하루는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받은 생활비를 '오늘 우리 이 돈을 다 쓰고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시면서 제게 구두를 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튿날부터 우리 모두는 양식과 차비를 두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식과 차비를 얻은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김동성 목사/ 남대구교회 시무, 선교학교 교번 7601001)

이처럼 믿음에만 초점을 맞춘 선교학교의 운영은 기존 신학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 신학교 신학생으로 있다가 구원을 받은 후 선교학교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은 조성화 목사의 간증을 들어본다.


"저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외삼촌과 어린 고종사촌의 죽음을 통해 어릴 적부터 하나님을 찾았고, 유교 집안인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대구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가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학생의 상당수가 사회에서 실패한 나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성공의 한 방편으로 목회자가 되기를 염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게 '왜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왔느냐?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나와야 세상에서 알아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지만, 너는 먼저 일반 대학에 들어가라.'고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신앙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그들과 함께 신학교에 다니는 것이 제게 참 곤혹스러웠고, 게다가 신학교의 수업조차 믿음과 상관없는 과목들이 많아 참 갈등이 되었습니다. 그런 갈등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몇몇 학생들도 가지고 있어서, 우린 서로 만나면 '이게 한국의 기독교 현실인가? 정말 성경적인가?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토론을 자주 했습니다. 또한, 저는 신학생으로서 교회에서 더욱 모범적으로 신앙 생활하려고 애를 썼지만, 늘 죄로 인한 정죄 속에 사로잡혀야만 했습니다. 당시 신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회개 기도로는 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제게 회의를 주었던 것은 목회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목회자들과 가깝게 지내다보니 멀리서 볼 때와 너무나 다른 목회자들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종이라 볼 수 없는 그들의 삶과 이권을 가지고 다투는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기독교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 더 이상 신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학년을 마치고는 도피하듯이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교육전도사로서 일을 했지만, 여전히 제 마음은 공허했습니다. 그러다가 같은 동료인 김범섭 하사관(현 브라질 선교사)의 인도로 한밭중앙교회 집회에 참석하여 강대석 목사님(기쁜소식수원교회 시무)과의 신앙 상담을 통해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면서 그토록 해결되지 않았던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진정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제 신앙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고, 참된 하나님의 마음과 신앙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로 신학교를 그만두고 선교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선교학교의 운영과 수업은 전적으로 믿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직업인으로서의 목회자 양성과 교회 경영에 초점을 맞춘 다른 신학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선교학교에서 믿음을 배우면서 비로소 저는 왜 일반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토록 믿음과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고, 하나님이 왜 기쁜소식선교회를 개혁의 선두주자로 사용하시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선교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을 구하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던 그때가 너무나 귀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조성화 목사 / 부산대연교회 시무, 선교학교 교번 8720094)


4) 기쁜소식선교회의 구심점


위와 같이 선교학교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고 졸업한 학생들에 의해 1978년 산청과 거창에 교회가 처음으로 개척되면서 한국에 복음적인 독립 교단인 기쁜소식선교회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산청침례교회(1978년 3월), 거창침례교회(1978년 3월), 서울제일교회(1978년 10월), 송정중앙침례교회(1980년 9월), 진주성민교회(1980년 9월), 남해중앙교회(1980년 9월), 전주평강교회(1980년 10월), 구미중앙교회(1980년 10월), 고흥침례교회(1982년 6월), 마산중앙교회(1983년 1월), 광주제일교회(1983년 3월), 한밭중앙교회(1983년 10월), 울산중앙침례교회(1983년 10월), 여수중앙교회(1983년 10월) 등의 교회가 전국에 차례로 생겨지면서 교단으로서의 기쁜소식선교회의 틀이 잡혀지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선교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선교학교 개교 10주년이 되던 1986년에는 기쁜소식선교회의 지교회가 이미 전국 주요 도시에 30여개가 세워져 선교회 역사상 최초로 부산 무궁화회관(이사벨여고 대강당)에서 박옥수 목사를 강사로 대전도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86년 부산 대전도 집회는 강한 성령의 역사로 7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구원을 받는 사도행전의 역사가 한국에서 재현된 기념비적인 집회였다. 그로 인해 이듬해인 1987년 한 해에만 전국에 무려 18개의 교회가 개척될 정도로 선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현재는 국내 주요 도시에 300여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고, 해외 역시 80여개국에 300여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해외 선교사들을 통해 시작된 해외 선교학교에서 배출된 현지 전도자들의 수와 교회는 그 이상이 된다. 다시 말해 국내와 해외의 선교학교는 한국과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기쁜소식선교회의 구심점인 것이다.

"나는 1976년부터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오전 시간의 대부분을 선교학생들과 보냈다. 선교학교 수업은 내게 정말 축복된 시간이었다. 사역을 하다보면 어렵고 힘들 때가 많았고, 때론 사역의 한계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형편일지라도 나는 매일 아침 선교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가득 차 있던 염려와 걱정, 실망과 좌절 등을 몰아내시고 믿음과 소망으로 가득 채워주셨다. 마치 죄로 인한 가책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던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서 변화시켰듯이 선교학교는 내가 어려움과 어둠 속에 잡힐 때마다 나를 변화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정말 선교학교는 나를 비롯하여 학생들과 우리 선교회를 위해 허락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박옥수 목사, 월간 '기쁜소식' 200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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