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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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Q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맞다’ 하면서도 마음은 내 생각에 이끌려 갈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하면 말씀에 이끌리는 신앙을 할 수 있을까요?
A. 먼저 내 생각의 출처를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은 항상 나를 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생각을 따르면 망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나를 위한다는 사실을 불신할 때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은 정확히 불신 위에 형성된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 8: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거할 때 사단이 인간에게 넣어준 생각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내 생각의 출처는 사단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면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을 수없이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도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버리지 않고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내 생각, 곧 사단의 음성도 함께 들립니다. ‘이 생각 따라갔다가 내가 망하지 않았던가? 이젠 내 생각 안 따라가. 버리겠어!’ 하고 마음을 정하면, 그때부터 말씀이 그대로 마음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편에 마음을 기울이면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가는 복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Q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데, 공부 때문에 매주 주일예배나 학생회 등 교회에 나가기가 싫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제 딸은 고등학교 때 내신 성적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 딸이 성경을 읽던 중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 고등학교에서 제 딸을 포함한 7명이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쳤는데, 그 해 인문계열 중에서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의 경쟁률이 90대 1로 제일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 7명 중에서 내신 성적이 제일 안 좋은 제 딸만 합격했고, 지금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또 한 지금 워싱턴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임병주 선교사님은 구원을 받은 후 시험 준비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학사장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만난 친구가 구원을 받고 같은 내무반에 배정되는 등 그 후의 군 생활도 은혜로웠습니다.

성경에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전 9:1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부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일들은 모두 은혜롭고 아름답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Q 여자친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건전한 이성교제를 할 수 있을까요?
A. 사실 청소년기에는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런 문제로 한두 번쯤 고민을 하기 마련입니다.

여학생에 대해 관심도 가고 사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더듬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에 대해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쪽으로만 마음이 빠지다 보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고 신앙생활이나 학업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여학생의 영혼을 생각하고, 그 학생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우고 조용히 주의 뜻을 구하게 되면 주님께서 지혜와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그 여학생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목사님의 인도를 받기 바랍니다. 그 여학생이 구원받아 주님 안에서 밝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마음을 쓰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에 초점을 맞추면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Q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봉사를 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올라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베드로의 경우를 살펴보면 베드로가 자기의 경험과 실력에 의지했을 때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에 들어온 후 그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렸을 때는 배 두 척이 물에 잠길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 왔던 베드로의 방법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를 이끌어 간 결과입니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굉장히 복음을 위해 사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가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배반자가 되어 신앙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에 들어와서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인데, 베드로는 자신이 배와 고기와 그물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 마음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몰랐던 것입니다. 사단은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을 다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며 오랫동안 우리를 속여 왔습니다. 인간이 열심을 다하여 봉사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잘 되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항상 악하다(창 6: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 하나님은 악한 인간이 한 것으로는 어떤 것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Q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기도는 응답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믿음이 함께할 때에 응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는 말씀처럼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나은 걸 보고 믿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형편은 아직 병에서 낫지 않았지만 다 나은 줄로 믿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편과 상관없이 마음에서는 이미 병이 다 나았다는 걸 믿으라는 겁니다. 다 나은 걸로 믿고 받아들이면, 결국에 다 나은 형편이 따라온다는 겁니다.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부부가 결혼한 지 9년이 되었는데도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해 보니 하나님이 아이를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신앙상담을 통해 하나님과 막힌 그 부부의 마음이 말씀으로 열렸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시 113:9)”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부인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믿음이 빠진 기도는 넋두리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를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됩니다.
Q 그동안 많은 헌금을 드렸지만 요즘 집안 경제사정이 나빠져 헌금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연보를 해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것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헌금한다는 마음으로 연보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 삶의 전부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기도 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께 많은 연보를 드렸는데, 역대상 29장 14절에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헌금이 부담스러운 것은 내 것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부요한 자이고 모든 것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내가 내 형편 안에서 연보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요함 안에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물질을 드리게 된다면 정말 축복된 연보가 될 것입니다.
Q 같은 교회에 다니는 자매님의 말과 행동이 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어요. 그동안은 참고 넘어갔지만 이제는 교회까지 나가기 싫어 고민입니다.
A. 성경은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가 원하는 선(善)이나 사랑은 없고 오히려 원치 않는 미움, 탐심, 악(惡)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 자신을 모른 채 나의 선한 모양과 좋아 보이는 것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려고 하면 결국 한계를 만나 시험에 빠지게 되고, 그 신앙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근본 마음이 악하고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을 미워하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더러운 내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형제자매가 일흔 번씩 일곱 번 죄를 범할지라도 여전히 그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용납하고 받아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과의 갈등에서 해방을 받아 마음에서 자유와 평안,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Q 일요일마다 결혼식 등 개인적인 일이 많이 생겨 매주 교회를 가는 것이 어려울 때가 종종 있는데, 주일은 매번 꼭 지켜야 하는 것인지요?
A.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자기 기준이나 양심도 일종의 율법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서 율법에서 벗어나 이제는 주님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율법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가족이나 주변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면 주일을 못 지킬 수도 있지만, 주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정(情)이나 도리에만 끌려가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때로 주님을 섬기는 일 때문에 가까운 분들이 섭섭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믿음으로 부담을 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를 위하여 준비된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는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Q 설교를 들을 때는 “저 말씀대로 살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삶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그 말씀과 제 삶이 너무 달라서 마음이 어렵습니다.
A. 신앙이 힘든 것은 성경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2006년 9월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성경세미나를 참석한 후 애틀란타 교회 후속집회 강사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제 몸이 매우 좋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당뇨수치가 무려 540을 웃돌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 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복음을 전하면 아무 문제없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제게 들려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을 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 지금은 매우 건강해져 당뇨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혼인 잔칫집에서 모자란 포도주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최후 결정이고, 이미 약속 안에서 다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편으로 마음을 옮기세요. 그때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강하게 이끄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Q 종교가 다른 시댁 식구들과 제사 등으로 자주 마찰이 생깁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A. 성경을 읽어보면 때로는 다소 모순된 것 같이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2장 1절에는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미움이 있기 때문에 마찰이 오는 경우가 있고, 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스스로 지키려다 보니 다른 사람과 마찰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드러난 행위로 인해 다툼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마찰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구원받은 후 삼촌과 선친의 제사를 함께하지 않는 것으로 다툼이 있었는데, 저는 차분히 제사가 종교의 차이에서 난 막연한 적대감으로 된 사실이 아님을 설명했고, 또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제사 의식도 한국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그 후에는 그들 앞에서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과 마찰을 피하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다시 오해가 쌓여 또 다른 마찰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마치 ‘큐브’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큐브’ 퍼즐을 맞추고 싶어 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전에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셨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갖고, 그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대화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Q 제 어머니는 구원을 받으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여전히 점을 보러 가시곤 합니다. 어머니께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할지 알려주세요.
A. 골로새서 1장 13절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이전에는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나 어려움에 대해서 우리가 염려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를 사함 받고 거듭난 이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의 운명과 미래는 점쟁이가 하는 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8장 31절부터 37절까지를 보면,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면서 위하시기에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두려움과 염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은 기우일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마음을 전해드려, 어머니께서 문제나 환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기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Q 간증은 왜 하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간증을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학교 다닐 때 구원받고 30년 넘게 교회 안에서 주님이 일하신 많은 간증들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 삶 속에서 주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간증도 있었지만, 어떤 간증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것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받은 간증도 있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꿈을 두 번 겹쳐 꾼 적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 꿈을 꾼 후 형들에게 고하자 형들은 그를 박대하고 미워했지만, 그것은 요셉이 장차 주님이 그에게 행하실 일에 대해서 형들에게 간증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일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요셉의 간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에서 앞선 사람들이 삶 속에서 경험한 간증을 듣고 형편은 불가능할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받아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처럼 간증은 주님의 마음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는 귀한 교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끌림을 받은 귀한 간증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전해져 모두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길 원하십니다.
Q 자백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A. 요한일서는 약 1세기 말 요한복음의 기자와 동일한 기자인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일서 1정과 2장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과정과 구원받은 후에 범하는 죄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쉽고 명확한 해결책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는, 우리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이미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씻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내 모든 죄와 육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면,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고 파괴되고 상실되었던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회복됩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게 하는 사단의 궤계

그러나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며, 말씀(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지 아니하면, 사단에게 미혹되어 우리 마음이 육신(肉身)을 따라 흘러가고, 다시 죄의 유혹에 빠지거나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사단은 우리의 범죄와 허물을 들고 나와 우리를 송사하고 참소(讒訴)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자유를 잃어버리도록 집요하게 역사 합니다. 우리가 범한 죄를 통해 양심에 가책을 주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부담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마음의 거리가 생기게 만듭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그 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주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사단의 음성을 계속 듣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요한일서 2장은 그 때 우리가 어떻게 사단에게 속은 데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귐을 가지면

먼저 성경을 봐 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요일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밝은 영적 사귐 안에 있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거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를 깨끗게 하시는 예수의 피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고, 주님과 정상적인 사귐을 갖게 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모든 죄는 깨끗하게 씻어지게 됩니다.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온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세기 경의 유명한 교부(敎父)였던 어거스틴도 그의 『참회록』 제 2권 7장에서 “주님은 자비와 은혜로 나의 더러운 모든 죄를 흰 눈처럼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이제 나는 변화받아 전에 지었던 죄악에서 떠나 살게 되었습니다....저는 죄인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지은 죄나 모르고 지은 죄나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나무 위에서 그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감당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셨다. 이렇게 당신을 단 한 번 제물로 드림으로써 나와 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로써 주님은 온전하고 완전하고 충분한 제물을 드리며 온 세상의 죄들에 대한 속죄(satisfaction 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를 이루신 것이다.”(『믿음에 의해 의롭다 하심』에서)

워치만 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에 억눌리거나 심지어 때로 시험을 받음으로 어떤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큰 죄, 작은 죄, 아주 검은 죄, 그렇게 검게 보이지 않는 죄, 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의식하는 죄, 의식하지 못하는 죄, 기억하는 죄, 이미 잊어버린 죄 모두가 ‘모든 죄’에 포함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피』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고, 깨끗해졌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요한일서 1장 8절을 보면서 혼돈스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이 말씀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아담으로 말미암아 다 죄인이 되었고, 죄 아래 있다고 증거합니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로마서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만일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주님

요한일서 1장 8절 뒷 부분을 보겠습니다.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진리)이 그 마음 안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죄가 있어야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를 느낄 수가 없지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17)

아무리 유능한 의원도 건강하다는 사람은 치료할 수가 없고, 아무리 유능한 구조 요원도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건져줄 수 없듯이, 예수님이 아무리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시고 능력이 크셔도 죄가 없다는 사람은 구원해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32) 그래서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 죄의 삯이 사망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루터의 자백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자, 죄를 자백해야 하는데, 죄를 어떻게 자백합니까? 우리가 삶 속에서 저지르는 범죄나 허물을 일일이 열거하여 아뢰고 고백하는 것이 자백입니까? 실제로 일평생 동안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자백할 수 있습니까?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의 모든 규칙을 지키며 누구보다도 기도와 금식과 참회를 철저하게 하며 자기 몸을 확대했지만 그 영혼의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21명의 성인(聖人)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아침마다 기도할 때 3명의 성인들에게 간구하였으므로 일주일이면 21명의 성인들에게 간구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평안을 얻지 못하였습니다.(시드니 휴튼 『기독교 교회사』‘16세기 독일에서의 종교 개혁’에서)

루터는 하나님이 명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인간을 심판하시고 형벌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통해 온전해지고 형벌과 심판을 면하려 했었습니다. 루터는 육체를 혹사했지만 그가 어떤 선행을 할지라도 자기 생각은 언제나 죄로 얼룩질 것이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특히 죄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으며, 하루에도 몇번씩 고해성사를 했지만 그의 통회가 진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백은 그에게 열려 있었고, 그는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서 자기 죄들을 자백했다. 그는 당시의 주도적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죄 사함을 받으려면 죄를 기억하고 자백하고 그 죄 하나하나에 대해 사면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는 여섯 시간을 계속해서 죄를 자백하고 고해소를 나서면서 미처 자백하지 않는 시소한 죄들이 생각나면 깊은 좌절에 빠졌다. 그러기를 몇 번이고 거듭하자 고해 신부는 마침내 짜증을 냈다. 다시 오려면 가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죽인 것 같은 고해할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오라고 했다. 그러나 루터의 문제는 자기 죄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남김없이 자백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를 더우 괴롭힌 것은 많은 죄들이 심지어 인식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람은 워낙 깊이 부패한지라 아무리 꼼꼼히 자신을 살펴도 빗나간 모든 행위를 다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죄나 저 죄를 사함받으려 하기보다 자기 본성 자체의 구속을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험이 말해 주는 것은 이 생에서는 결코 본성이 온전히 구속되고 개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롤라드 베인턴 저, 이길상 역 『세계교회사』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 300)

한번 죄에 대해 고해(penance)를 시작하면 때로는 6시간 동안 계속하기도 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도 그는 깊은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서 늘 번민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해 본 사람이라면 동일하게 루터가 도달했던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죄와 범죄

성경은 ‘죄(sin)’와 ‘범죄(sins)’를 구분하여 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복수의 범죄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로마서 5장 12절 이하부터 8장까지의 후반부에는 ‘범죄’가 한번도 나타나지 않고, 근본적인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죄보다 그 범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 다시 말해 죄가 들어와서 나타나는 증상을 죄로 알고, 그것을 일일이 고백하는 것이 죄의 자백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죄'를 자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범죄를 자백하면서 죄를 자백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라고는 전혀 못하는 학생이 선생님께 와서 ‘선생님, 저는 국어를 잘 못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얘, 너 수학은 잘해? 영어는? 과학은? 네가 국어만 잘하면 돼?’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과목은 다 잘하는데 국어만 잘 못하는 학생은 ‘선생님, 저는 국어를 잘 못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고, 수학도 못하고, 과학도 못하는 학생은 ‘선생님, 저는 공부라고는 못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말해야 자신의 근본을 아는 학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부라고는 아예 못하는 학생이 ‘선생님, 저는 국어를 못 합니다. 저는 책도 못 읽습니다. 저는 받아쓰기도 못 합니다. 저는 말하기도 못합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 제가 거짓말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그래? 넌 죄가 거짓말한 것밖에 없나? 네가 거짓말한 그 죄밖에 없다면 그 죄만 고백하고 그 죄만 씼으면 돼.’라고 하시겠죠. 그런데 우리 속에는 악한 사단의 마음과 생각이 들어와 있어서 주님께서 마가복음 7장 20절 이하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범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몇몇 가지 범죄를 고백하고 그것을 회개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지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근본을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나 육에 속한 우리 인간의 본성, 자아(自我)가 근본적으로 악함을 깨닫고 그것을 자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리의 자백

자, 그럼 성경에서 진정한 자백이 어떤 것인지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눅18:9)였습니다. 죄인이 되어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한데,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느라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의(義), 자기 선(善)에 취해있는 이런 사람이 바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라는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어떠했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이 사람은 “하나님, 제가 아무개에게서 세금을 포탈했습니다. 아무개에게서 부정한 방법으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속여 취한 돈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상납하고, 얼마는 술값으로 썼습니다.”라는 식으로 범죄를 낱낱이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자신의 근본을 발견하고 시인한 것입니다. 마치 문둥병이 전신에 퍼져버린 모습과 같은 자신(레위기 13장 12~13절)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자백입니다.

십자가의 강도의 자백

성경에서 또 다른 예를 한번 제시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行惡者)가 나옵니다. 그 두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 못박힌 상태에서 예수님을 욕했습니다.(마27:44) 그런데 한 강도는 그런 자기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입으로만 죄를 고백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悔改)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한 강도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눅21:41) 이 강도는 어떻게 자기 죄를 자백했습니까?

“예수여, 내가 스물 다섯 살 때 남의 집을 털었습니다. 그 때 칼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남의 물건을 몇 가지 탈취했습니다. 그러다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박혀 피가 철철 흐르고 곧 죽어가는데, 언제 지난 세월 동안 지어 온 모든 범죄를 일일이 다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겠습니까? 그 강도는 스스로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멸망임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런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그런 자신을 고백하며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참된 자백(自白)입니다.

자백의 결과

이렇게 마음에서 성경적인 자백을 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 9) 저는 죄를 자백한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지금 깨끗해졌습니까?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깨끗합니까?”라고. 정확하게 자백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신 대로 깨끗해져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깨끗합니까? 의롭습니까?”라고 물어 보면 “예”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못하면서 날마다 죄를 자백하는 삶을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전에 올라간 세리는 돌아갈 때 어떻게 돌아갔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18:14) 근본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자백하고 하나님의 긍휼 앞에 나아간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자백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는 모든 불의에서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어떠합니까? 그가 자신의 근본을 자백했을 때 그 자리에서 낙원을 약속받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이 말씀도 역시 요한일서 1장 8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셨고, 로마서 5장 12절에서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지요.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를 지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의 긍휼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죄든지 사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범죄할 수 있다

자,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고 나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아도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믿음으로 산 간증도 있고, 하나님께 받은 약속이 있고, 내게 귀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을지라도 범죄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나 다윗이나 삼손, 베드로의 삶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나면 우리가 범죄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육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시고, 때로 징계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은혜가 아니면 사단에게 속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죄를 짓는 걸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지, 죄에다 내어준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1)

구원받은 사람이 범죄했을 때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이 교만해지고, 사단에게 속아서 죄를 범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 요한일서 2장 1~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2장 1절은 “나의 자녀들아”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 구원을 받기 전이나 구원을 받은 후에나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실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길은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이 없고, 그 십자가로 돌아가 그 십자가를 의지하는 길 뿐입니다.

구원자도 되시고 대언자도 되시는 예수님

그리스도는 우리를 과거의 모든 죄에서도 구원하셨지만 앞으로 우리가 죄를 지을 죄에 대해서도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사단의 송사(訟事)로부터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우리가 여전히 의롭다고 증거해 주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가 있으니(And if any man sin, we have an advocate with the Father)” 주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연약하고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범죄(犯罪)를 낱낱이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때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언자를 바라보고 그 대언자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대언자’는 영어로 ‘dvocate’인데,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호해 주고, 옹호해 주고, 우리를 지지해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변호사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변호해 주십니까?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틀림없이 사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짓는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이미 대신 받으시고 죄를 끝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십자가의 능력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주목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죄를 짓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를 짓기 때문에 정죄를 당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사단의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허물과 연약함도 이미 해결해 놓으신 사실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정죄를 당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죄인이고, 모든 죄를 영원히 씻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왜 마음이 왜 어둡습니까? 내가 못 났고, 잘못하고 실수하고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문제는 부족한 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부족한데 마음이 빠져서 ‘내가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어렵게 하시고, 돕지 않으시는가 보다.' 라고 생각해서 그 마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버리고, 주를 믿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내가 어떠하든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나를 도우시고, 이끄시고, 위하신다.' 하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사단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우리가 율법(律法) 전체를 다 지킨 것과 똑같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힘입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義)와 하나님의 의(義) 두 가지를 다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義)도 세워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깨뜨려지면 큰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는 가지고 갈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의 하나만 가지고 나아가면 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의는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의 의를 버린 자들, 자기의 의가 무너진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육(肉)은 사단에게 길들여져 있어서, 구원을 받은 뒤에도 ‘내가 잘해야 안 되겠나?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시는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그러한 자기 생각을 믿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허물이 드러나거나 부끄럽고 악한 게 드러나면, 그것을 숨기려는 쪽으로 마음이 달려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거야. 하나님이 나는 사랑 안 하실 거야. 내가 하는 기도는 안 들으실 거야' 라는 생각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복주시겠다고요. 우리가 잘한 것을 보고 복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예수님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엡1:3)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맡기십시오.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주관하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Q 신앙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어려움, 핍박, 고난 그 앞에서 어떻해 해야 하나요? 핍박도 하나님이 허락하신건가요?
A. 김하영 자매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 드립니다. 자매님의 글을 대하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직도 믿음의 깊은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핍박을 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울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시험을 당치 않게 하실 수 없어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어려운 일을 전혀 당치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도움이 없어도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경험이나 방법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주님께 기도하게 될 것이며, 그때 주님께서 능히 시험을 이기고 남을 힘을 주셔서 우리를 승리케 하십니다. 또한,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도 자라게 되어 옛날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케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매님이 당하는 어려움도 사실상 자매님에게나 어머니에게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 후서 2장 3절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님. 담대히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께서는 결코 자매님을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도우셔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